본문 바로가기



페이지 위치

Home > 입학・진학 > 학교홍보

학교홍보


학교홍보 관리 담당자 : 전용면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첨부파일, 내용 순의 게시글 보기입니다.
제목 안성과 공베르 신부
작성자 김민주 작성일 2019.05.21 조회수 217
첨부자료
신부의 부임(1900년 10월 19일) 당시 미양 바울 공소와 갈전리 공소가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안성읍내에는 교회는 물론 신자 한 명 없었다. 첫 선교지 안성으로 부임된 신부는 먼저 통진(通津,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에 있는 옛 읍) 군수를 지냈던 백씨의 땅을 성당터로 구입하고 그곳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75년 4월 27일 생의 20대 중반의 젊은 신부가 낯선 주민들은 신부의 목숨을 위협하고 내쫓으려 하였으나, 지적이고 공정한 이웃 고관의 도움으로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 압박감과 함께 한국식 식생활로 인해 이질과 변비에 시달리다 항문에서 2중 누관이 발생하여 수술을 하였다.
신부는 병자에게 약을 나누어 주고, 정원에 포도나무(마스카트(MUSCAT))를 심어 열매를 먹고자 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서 주민들과 친숙해지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무력행사가 있기 전 고관들의 신부와의 의논 제의가 있었고, 그 결과 무분별한 일본인의 살생을 예방함으로 타 지역과 비교하여 일본인의 보복 살생을 막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일곱 차례나 발생한 의병활동에 대한 일본의 보복에 있어서도 신부와 성당은 사람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신부의 자문과 함께 주간에는 태극기로,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행렬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에 대한 무분별한 과격 행위를 방지하고, 한편으로는 일본 경찰들에게는 폭력진압을 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이 지금의 양성면 만세고개에서 절정을 이루었을 때, 일본 경찰들에게 쫓겨 온 사람들을 성당에서 받아주고는 성당 정문에 프랑스 국기를 내걸고 치외법권을 주장하고 부상자들을 직접 치료하여 주었다.
이러한 험난한 시기를 보내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의병 활동의 한계와 당시의 암울한 교육여건을 살피고 안성의 지식인과 뜻을 함께 하여 1909년 1월 15일에는 공교안법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이바지하고 오늘날의 안법고등학교가 있도록 큰 힘을 쏟았다. ‘공교’(公敎)는 가톨릭을 한역한 것으로 공변된 교회라는 뜻이며, ‘안법’(安法)은 “안성의 프랑스”라는 뜻으로 ‘안’(安)은 안성이라는 지명에서 ‘법’(法)은 프랑스를 한문화한 ‘법국’(法國)에서 유래한 것이다.
1922년 당시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30칸 기와집 동안 강당을 구입하여 철거한 기와와 돌, 목재들과, 기둥과 들보로 압록강 재목을 보통 재목으로 충남 서산 재목을 더하여 지금의 안성 성당을 건축하였다(명동성당을 설계한 위돌 박(파리외방선교회) 신부가 설계). 무엇보다 성당의 건축에 있어서는 신자뿐만 아니라 신자가 아닌 주민도 성당 건립에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1922년 8월 15일 첫 미사와 함께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현재의 종탐과 마감형태는 6.25 전쟁 후 증축한 모습으로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 82호 지정되어 있음).
1900년 26세의 낯선 이방인으로 안성에 왔던 청년 신부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1932년 사제 전근으로 안성을 떠나게 되었고, 이는 동아일보의 1932년 10월 4일자 신문에 ‘공안국씨 석별’이라는 제목으로 전근 소식과 신부의 33년간의 공적에 대한 기사가 났다. 일간지에서 이처럼 한 본당 신부의 전근 소식을 전하고 그의 공적을 치하한 것으로 보아 신부가 안성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부는 1932년 당시 서울 용산에 위치한 신학교, 예수 성심학교(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제양성에 힘썼다. 이후 6.25 발발당시 피난을 가지 않았던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한국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남은 갈멜 외국 수녀님들과 함께 북한군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옮겨졌다 미군포로들과 고산진 수용소로 이동하다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1950년 11월 12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했던 하느님께로 평화로이 떠나갔다.


                                                                                                               안법 100년사에서...
목록
이전글, 다음글 게시글 리스트 입니다.
이전글 2019 안법고 소개 책자
다음글 다음 게시물이 없습니다.

페이지 맨 위로 이동